소중한 인연들, 그 속에 담긴 세월의 흐름
소중한 인연들, 그 속에 담긴 세월의 흐름
  • 일산무지개성모안과 동은영 원장
  • 승인 2016.11.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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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난다. 진료를 통해 하루에도 수십명의 다양한 사람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원의사들에게는 으레 단골고객이 있기 마련이다.

필자는 개원한 지 고작 7년이 좀 넘었지만 단골고객들에게서 세월을 느낀다. 특히 노인들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그들의 걸음걸이, 구부정한 자세, 얼굴의 주름살, 늘어가는 흰머리 또는 현미경으로 본 수정체의 노화에서 세월을 느낀다. 노인의 세월은 유독 빨리 흐르는 듯하다.

개원 초기부터 우리 안과에 다니던 어르신 부부가 있었다. 두 분 다 90세 가까운 연세로 할아버지는 작은 키지만 매우 정정하셨고 할머니는 거동이 힘들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동은영 일산무지개성모안과 원장

수년간 한 달에 한 번은 꼭 백내장 안약과 인공눈물을 처방받으셨는데 어느 때는 두 분이 함께, 어느 때는 할아버지사 할머니 약까지 타 가셨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함께 오는 경우가 차츰 줄었다.

재작년에는 서울로 이사했는데도 2~3개월에 한 번은 이전처럼 처방을 받으러 오셨다. 할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을 못한다 하셨고 다음에 오셨을 때는 할머니가 이제 자식들 얼굴도 못 알아본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때가 되면 정확하게 방문하던 분을 못본 지 1년이나 됐다. 소식이 궁금해 전화를 하려 해도 차트에 적힌 번호가 예전 일산전화번호라 안부를 여쭐 수도 없게 됐다. 아마도 할머니는 돌아가셨을 것이다.

의사도 사람인지라 반가운 환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환자도 있다. 필자는 이 분들이 오면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 문 앞에서 인사드렸고 어르신은 그게 흐뭇하셨는지 필자와 직원들에게 먹을 것이나 작은 선물을 하시곤 했다. 필자는 송구한 마음에 더욱 친절하게 대했고 때가 되면 정기망막검사를 추가진료비 없이 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가을을 가장 좋아했다. 푹푹 찌는 무더위가 지난 다음 찾아오는 가을, 그 청명한 바람과 색색의 나뭇잎, 옷깃을 여미게 하는 선선함이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상쾌한 아름다움이 오히려 슬프다. 곧 잎은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한 해가 갈 것이다. 사람들은 가을을 타는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필자는 인생의 짧음을 아는 나이가 됐기 때문이라고 느낀다. 이제 그 가을을 다시금 마주하고 있다.

이미 영정사진을 찍어 놓은 어르신들이 느끼는 계절은 어떨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계절에 느끼는 감성은 여느 예술가보다 섬세하지 않을까?

어느날 늦은 겨울에 나뭇가지가 부드러워졌다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에 감동 받은 적이 있었다. 가지가 부드러워졌다니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이후 그 시기가 되면 가지가 부드러워졌는지 유심히 보게 됐다.

마지막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의 자세는 담담하다. 보통 어르신들은 건강에 대한 걱정이 많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죽고 사는 것이야 인력으로 할 수 없으니 살아생전 병들어 고통스럽거나 자식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워한다.

그 어르신이 오면 그저 ‘좋습니다, 이상 없으세요!’ 이런 두어 마디면 진료가 끝난다. 어르신 역시 별달리 묻는 것도 없었다. 어르신은 노인답지 않게 간결했으며 편안하고 밝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사실 백내장이 조금씩 진행 중이었지만 아직 백내장 초기상태라 여생 동안 수술 없이도 충분할 것이라 여겨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의사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스러져 가는 것을 경험할 것이고 어느 날엔 필자의 차례도 올 것이다. 이제는 혼자가 됐을 그 어르신의 여생이 많이 외롭지 않기를, 마지막까지 편안한 미소를 간직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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